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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4.02 개화된 너도 풍란의 자태2
  2. 2006.04.02 개화된 너도 풍란의 자태1
  3. 2006.04.02 개봉 2탄:함소화
  4. 2006.04.02 개봉 1탄 : 함소화
  5. 2006.04.02 개봉박두:함소화
  6. 2006.03.16 충주박씨 항렬표 1
  7. 2006.03.16 충주박씨
  8. 2004.12.08 사용자 교육을 마치고...
posted by 구름너머 2006. 4. 2.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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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6. 4. 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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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6. 4. 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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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6. 4. 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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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6. 3. 16. 22:35

충주 박씨(忠州 朴氏)

시조 박영(朴瑛)은 신라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 박언창(사벌 대군)의 10세손(박혁거세의 39세손) 박견의 손자이다. 그는 고려 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을 지냈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領土)로 국원성이었는데 신라 유리왕 때 점령(占領)하여 진흥왕 때 소경(작은 서울)으로 하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尙州) 박씨(朴氏)에서 분관하여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대표적 인물]

박상(朴祥) :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박순(朴淳) :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박우, 박희수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20명의 문과 급제자와 1명의 상신과 대제학, 1명의 청백리를 배출하였다.

[항렬표]

65세

66세

67세

68세

69세

70세

재(載)

제(濟)

하(夏)

종(鍾)

근(根)

규(奎)

원(原)

우(愚)

종(鍾)

근(根)

기(基)

수(洙)

용(容)

석(錫)

래(來)

규(圭)

열(烈)

환(煥)

1985년 현재 23,617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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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박씨재실(忠州朴氏齋室)

2005.2.8일

도솔산 아래, 서대전여고 아래, 월평공원 입구에 충주박씨재실이 있다. 이곳을 2~3년동안 자전거를 타며 지나다녔지만 옛것에 대한 관심을가지기전까지는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 곳이다. 오늘은 이곳과 밀양박씨재실 수정재와 도솔산내의 내원사를 둘러보기로 했지만 시간상 수정재는 다음에 오기로 했고 내심 기대했던 내원사는 내가 원한 고찰이 아니였고 천태종이였다.


외삼문에는 돈후문, 충주박씨대종중, 충주박씨재실, 도동서당이라는 현판이 있다.

거의 항상 문앞에는 트럭과 경운기가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아쉬운 것은 이러한 것과 날씨가 흐려 멋진 푸른하늘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과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허비와 행록비..


재실인영모재이다.

웅장한 모습이 멋있고 고풍스럽다.


사당인 추원사가 보인다.
월평공원안쪽으로 들어가다보면 참의공 박진의 묘소 입구가 나오고 안내에 따라 길위로 올라가면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묘소와 비석과 문인의 상이 있다.
충주박씨의 한 파를 이루고 있는 참의공 박진의 묘소인 듯 하다.
옛 선조들을 모신다는 것 그들의 뜻을 모신다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된다.
타산지석 삼아 나의 성씨에 대한 자료며 유적을 돌아보아야 겠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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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재 (永慕齋)

지정명 : 문화재 자료 위 치 : 도마2동 42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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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동 여성회관과 변동 변전소 중간쯤에 최근 개설된 서부간선도로 옆으로 서대전여고가 있다. 이 학교와 이웃해 개천을 복개한 도로와 이어진 도솔산 등산로 입구에 1990년에 지어진 충주박씨재실이 위치한다. 돈파사에 배향된 의금부도사 박로(義禁府都事 朴輅)가 쓴 편지에 의하면 이미 이곳에는 영모암(永慕庵)이란 서재가 있었다. 이후 여러차례 고쳐 내려오며 최근까지 참의공 박진(參議公 朴蔯)의 재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87년의 큰비로 일어난 산사태에 무너지게 되어 다시 지었다. 재실 뒷편 야산에는 임건(林騫)의 사위가 된 박진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 묘역이 있고 앞에는 조그만 개천이 흐른다.

재실은 외곽 담장안에 다시 담장으로 구획하여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한다. 앞쪽에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를, 뒤쪽 높은 대지에는 사당인 추원사(追遠祠)를 각각 배치 하였다. 외삼문의 중앙 솟을 문에는 가운데 '돈후문(敦厚門)' 과 '충주박씨재실(忠州朴氏齋室)', 좌우 협문에는 각각 '도동서당(道洞書堂)' 과 '충주박씨대종중(忠州朴氏大宗中)'이란 현판을 걸었다. 충주박씨는 충효를 전해가고 돈목을 지켜가자는 뜻의 '가전충효 세수돈목(家傳忠孝 世守敦睦)'을 가훈으로 하고 있다. 영모재는 다듬은 화강석 기단위에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 구조로 지어졌다. 그 가운데 중앙 3칸 통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대칭되게 온돌방을 두었다. 재실 우측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지어 전사실(典祀室)이란 현판이 걸린 관리인 살림채가 있다.

영모재 뒤로 내삼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추원사(追遠祠)란 현판을 건 사당이 있다. 추원사는 맞배지붕에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내삼문에는 첨송문(瞻松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이곳은 충주박씨의 시조인 고려부정 박영(高麗副正 朴英)을 비롯 박진의 아버지인 의랑공 광리(議郞公 光理)까지 8세 선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들의 묘는 개성에 있었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며 모두 잃어 버렸다. 위패는 좌에서 우로 부정공(副正公), 장군공(將軍公), 우사공(右使公), 평리공(評理公), 판사공(判事公), 상서공(尙書公), 첨의공(僉議公), 의랑공(議郞公)의 순서로 놓여져 있다. (<충주박씨 세계도>참조)

재실 밖에는 가장 우측에 박진의 유허비(遺墟碑)를 비롯 충청병마절도사 박형무(忠淸兵馬節渡使 朴衡武), 상주판관 박원창(尙州判官 朴原昌), 의사 박사진(義士 朴士振), 의금부도사 박로(義禁府都使 朴輅), 충원군 박동형(忠原君 朴東亨)등 그들의 행적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새로 만든 박효함신도비가 있다.

<자료발취 - 혜천대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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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취 - http://www.hometer.co.kr/sungu.htm성씨의 유래

충주 박씨

중조 박영(朴英)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41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대군(沙伐大君) 언창(彦昌)의 12세손으로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 벼슬은 부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충주가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었으나, 신라 유리왕 때 이를 취하여 진흥왕 때 소경을 두어 그 지방의 지배세력이었던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선대부터 토착한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충주박씨는 조선조에서 20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의 상신 및 대제학, 그리고 청백리 1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박상(朴祥)과 박순 (朴淳)을 들 수 있다.

문간공(文簡公) 박상은 조선 목사를 지냇으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다. 1501년(연산군7) 진사로 문과에 급제, 전라도사 재임시 연산군의 폐희 (嬖姬)의 아버지 우부리를 장살, 대죄했으나 중종반정으로 무사했다. 사간원 헌납 재임시 종친의월자승당을 반대하여 한산군수로 좌천 되었다가 그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호당에 뽑혔다. 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 재임시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중종반정 후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반정훈신의 추죄를 상소, 권신의 격렬한 반발로 남평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내고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 나주목사로 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평생을 직절강명으로 일관, 귄귀의 배척을 받았으나 기묘사화 때에는 복상중이라서 참화를 면하고 피화자들을 구휼했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성현 (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한문4가>로 일컬어진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충공(文忠公) 박순은 상의 조카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을 거쳐 이조참의, 대제학,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내고, 선조 초에 영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직했다. 시, 문, 서에 두루 뛰어났고, 특히 시는 당시의 풍을 따랐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상의 아우 인 박우는 한성부좌윤을 지냈으며,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이다. 1510년(중종5) 진사로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역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전횡을 일삼자 자청하여 남원부사로 나갔고, 뒤에 도승지로 있다가 허항(許沆) 등의 모함으로 공주목사로 좌천, 이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병조, 이조참의, 개성유수, 한성좌우윤을 지냈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감수, 만년에 전주부윤을 역임했다. 뒤에 도승지, 참의, 동지춘추관사 등을 거쳐 명종 때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하여 권귀의 근질긴 모함을 받았다. 청백리에 녹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희수(朴希壽)는 명종조의 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로 선조조에 음보로 참봉에 등용되어 형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호남에서 박광옥(朴光玉)·고경명(高敬命) 등과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근세 인물로는 <떠나가는 배>의 작가 박용철(朴龍喆)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 외국 문학 소개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신문학지>를 창간 주재했다. 애수, 회의, 상징이 주조를 이룬 섬세한 감각의 시를 썼다. 경향파에 대항, 순수시를 옹호하는 평론을 썼고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신극운동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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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취 - http://210.218.34.12/yck/ycksizo01/B6.htm이야기 꿈동산
시조
: 박영(朴瑛)은 신라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 박언창(사벌대군)의 10세손
(박혁거세의 39세손) 박견의 손자다.
박씨의 기원인 박혁거세로부터 박영까지의 약  1200년간은
계보와 사적이 실전되어 알기 어렵다. 
따라서 충주 본관을 얻은 것도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이었는데 신라 유리왕 때 점령하여
진흥왕 때 소경(작은 서울)으로 하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본관
: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 박씨에서 분관하여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충주는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인데,신라에서 빼앗아 진흥왕때
소경을,경덕왕때 중원경을  설치하였다. 
고려조 태조 23년에 지금이름으로 고쳤고 고종 41년에
국원경으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주요 성씨로는 박.강.김.양.최.유.노.지.어.석.동씨 등이 있었다.
항렬표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원(原) 근(根) 용(容) 규(圭) 재(載) 종(鍾) 원(原)
우(愚) 기(基) 석(錫) 열(烈) 제(濟) 근(根) 우(愚)
종(鍾) 수(洙) 래(來) 환(煥) 하(夏) 규(奎) 종(鍾)
23,617명이 있다.(1985년)
파명
: 파로는 참의공파.강릉공파.참판공파.판서공파.함경도파.평안도파.
찬성공파 등이 있다.
참의공파의 경우 박진의 자손이 주로 대전을 중심으로한 충청도
지역에 산거하여 점차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네 째 아들 박언함의
일부 후손들은 전남의 나주군과 광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판서공파의 경우 박소는 지금의 대덕에 터를 잡았으나 큰아들
박인흥은  함경도,세째 아들 박례흥은 평안도로 이거해 갔다.
한편 둘째 아들 박의흥은 대덕에 머물러 살았으며,
박지흥은 홀로 남하하여 광주에 정착한 후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인물
박신 : 고려 대장군
박득승 : 고려 첨의평리
박세량 : 고려 도첨의사사
박소 : 조선 판서, 박세량의 손자
박수기 : 조선 관찰사
박형문 : 성종 6에 알성문과급제
박순 : 18세에 진사, 영의정
박억년 : 조선 한림학사
박동현 : 경종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박제륜 : 의성 예천 달성 성주 영양 등 5개군의 군수
개요
고려말 박진과 박소 형제는 고려가 기울어가자 송경을 
떠나 공주(지금의 대전시 도마 동)에 터를 잡았다. 그리
하여 참의공파는 영동군 대곡면.금릉군 봉산면.제천군 백
운면.논산군 은진면.대덕군 산내면.나주군 동 강면 등지에
세거하고 있으며,판서공파는 정진시 홍원군.대전시.맹산군
정읍군 영원면 등지에 살고 있다.
현재 인구는 약 23,617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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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교육이 끝났다.

운용서버의 DNS 설정문제로 서버가 제대로 기동되지

않아서 당황을 했다.

교육 후 나온 요구사항들이

당혹스러운 것들이 2건정도 나왔다.

요구분석 미흡1건,

사용자 요구사항이 지금나온 것 1건,

기타사항들....

사용자의 관심과 참여가 없는 시스템은 죽어갈 수 밖에 없다.

시간과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걸 절실히 느낀다.

일정이 또 바뀌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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