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 무리 중에 후지카쓰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8·15 광복 후 죽었을 때 집에서 길이 120㎝ 가량 되는 칼이 하나 발견됐다.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계속 ‘민비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떨고 있는 궁녀들 중 용모와 복장이 아름다운 두 명을 참살했다. 또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 옆방의 옥호루로 끌어내 살해했다.…’왕비의 관자놀이에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세 구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는 것이 확인됐다.”(쓰노다 후사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살아서는 외국 사신에게 얼굴조차도 보이지 않던 지엄한 국모였다. 폭도들 중 하나였던 고바야가와는 “방 안에 들어가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 위에는 짧은 흰 속옷만 입고 있었고 아래는 흰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는 맨살이다”고 썼다. 또 한 사람의 폭도 이시즈카 에조는 “정말로 이것은 쓰기 어려우나…”하며 황후를 향해 말 못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을 고백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전하는 또하나의 문서가 발견됐다. 당시 서울 주재 일본 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옥호루 실내에서가 아니라 마당에 끌려가 여러 사람이 짓밟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것이다. 시해가 우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황후가 누구인지 목표를 정하고 군사작전하듯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진실의 일부일 뿐이다. 폭도들 중에는 하버드대학과 도쿄대를 나온 지식인, 훗날 국회의원 장관 외교관을 지낸 인물들도 많았다. 시해의 주모자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권력의 핵을 이루고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실무책임은 육군 중장 출신 주한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맡았다. 그러니 사실상 일본 정부가 저지른 범죄였다. 폭도들은 훗날 형식상으로 재판에 회부됐다가 모두 풀려나 영달의 길을 걸었다.
힘이 없으면 언제 능욕을 당할지 모르는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