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구름너머 2004. 9. 10. 14:06

기사 분야 : 경제

등록 일자 : 2004/09/06(월) 18:45

[퇴출이후…무너진 중산층]<2>중산층에서 新빈곤층으로

《몸이 건강하고 적극적인 마인드가 있는데 중산층에서 월 소득 115만원 이하의 ‘빈곤층’으로 급전직하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 취재팀도 그랬다. 그러나 빈곤층으로 확인된 45명(비정규직 9명, 자영업 및 개인사업 16명, 실업 20명)의 삶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런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인 편견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구멍 뚫린 사회안전망과 재취업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 정글 같은 사회에서 한두 번의 실패는 곧장 빈곤층으로 연결된다.》

빈곤층으로 떨어진 45명의 삶은 크게 두 가지의 길을 걸어왔다. 퇴출 직후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정규직 재취업이 봉쇄된 채 비정규직을 전전해온 이들이 하나. 또 식당, 독서실, 택배업, 공인중개사, 인쇄업 등 가게나 소규모로 창업한 회사가 부도 직전에 있거나 이미 실패해 비정규직으로 옮겨가거나 실업자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은행원의 특권’이 족쇄로=외환전문가였던 박모씨(41). 보증을 잘못 서 퇴출 이후 떠안은 빚이 7000만원이나 돼 신용불량자가 됐다. 박씨를 데려가려던 국민은행도 신용불량자 채용은 곤란하다며 돌아섰다. 결혼을 약속했던 중학교 교사도 떠나보냈다.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해 속칭 ‘떴다방’을 따라다녔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전화기 도매점도 차려보고 친구와 애견센터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신용불량자만 안됐다면 박씨는 지금쯤 연봉 7000만∼8000만원을 받는 차장급 은행원에 중학교 교사와 단란한 가정을 꾸렸을 것이다. 현실의 그는 아직도 미혼이며 홀로 사는 노모(67)에게 얹혀산다.

박씨처럼 퇴출 당시 30대 중반 이하의 젊은 직원들이 빈곤층으로 추락한 이유는 ‘은행원의 특권’이 퇴출 후에는 족쇄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동화은행을 포함해 당시 시중은행들은 직원들에게 전세금(3500만원)은 무이자로, 주택구입자금은 시중금리인 연12%보다 훨씬 낮은 1∼2%에 빌려주었다. 또 직원들에게 우리사주를 살 것을 장려하면서 수천만원씩을 빌려줬다. 직원들은 동료나 친구의 대출보증을 기꺼이 섰다.

그러나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동화은행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으며 빚을 갚을 여력이 없는 이들은 신용불량자가 됐다. 퇴출 직후 동화은행에 빚이 있는 직원은 1486명이나 됐으며 액수는 307억원이었다. 다른 금융기관에 갚아야하는 빚도 많았다.

3000만원의 전세대출금이 있었던 부산 부전동 지점 행원출신 이옥진씨(36). 그는 6년간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도 박봉을 쪼개 1165만원을 갚았지만 20%에 가까운 연체이자 때문에 아직도 빚이 4100만원이다. 그동안 빚을 못 갚아 형사고소를 당한 직원만 40명이 넘고 교도소에서 실형을 산 직원도 3명이다.

▽‘퇴출자의 무덤’ 자영업=45명 중 퇴출 당시 40대 중반 이상의 차장과 지점장급이 대부분이던 16명은 자영업이나 창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상은 은행원 시절에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상당수. 모두 자본금을 소진하거나 빚만 커지는 실패를 맛보거나 부도 직전의 상태에 있다.

대구에 24시간 편의점을 차려 몇 달 동안 재미를 봤던 이모씨(42)는 주위에 갑자기 편의점 10개가 생기면서 매출이 격감해 문을 닫았다. 의류가게를 하던 부인 사업도 경기 때문에 기울고, 경제문제로 다툼이 잦아지며 최근 이혼절차를 밟고 있다.

퇴출 전만 해도 ‘임원1순위’ 지점장으로 꼽혔던 김모씨(54). 지난해 큰 맘 먹고 권리금 2억원에 중개업소를 인수했지만 6개월 동안 전세계약서 1통만을 썼다. 김씨는 “점심때 도시락을 가져오는 집사람 말고는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숨지었다.

지점장을 지낸 박모씨(58)는 퇴직 후 2년간 사채업에 손을 댔지만 빚만 2억원이 생겼다. 박씨는 “다른 사채업자들과 달리 나이도 많고 ‘욕’도 못한다고 소문이 나서 악성연체자들이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년에 “노후보장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은행 동료들과 1억600만원을 모아 ‘굿모닝 시티’ 상가를 분양받았으나 시행사의 부도로 요즘은 반값에 매물로 내놔도 팔리지 않고 있다.

재직시절 법인영업을 담당, 고급술집 접대를 많이 해본 박모씨(44)는 퇴출 직후 술집을 차렸다. 은행원 시절에 생각한 술집은 쉽게 돈을 버는 것으로 보였다. “몸만 낮추면 잘될 줄 알았죠. 그러나 술집 접대부 관리나 외상값 받아내기 등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한 부분을 제가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박씨는 빚만 4억원을 지고 술집을 포기했다.

▽결국 비정규직이나 실업으로=신용불량자나 자영업에 실패한 이들을 받아준 곳은 채권추심회사나 다단계 회사 등 비정규직뿐이었다. 수도권 지점 차장이었던 이모씨(51)는 암웨이, 웅진코웨이 등 유명 다단계 회사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2년을 못 가 손을 들었다.

“정수기 샴푸 세제 등 아이템을 바꿔가며 주로 친지나 친구들에게 제품을 팔았지만 아는 사람이 더 이상은 사주지 않는 ‘낙엽’ 신세가 되면서 업계를 떠났습니다.” 이후 대부업에도 손을 댔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 이씨는 4억원에 이르던 재산을 모두 날리고 빚만 3000만원 쌓인 신용불량자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면서 공사판 막노동, 대리운전, 술집 웨이터, 대리운전사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빈곤층으로 추락한 이들 상당수는 삶의 의욕을 포기했다.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박모씨(46)는 현재 위암에 걸려 위장을 70%나 잘라냈지만 매일 술로 하루를 보낸다. 취재진이 “자꾸 술을 드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는 “요즘 같아서는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짧게 말했다.

▼‘무너지는 가족’ 가장 뼈아프다▼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 빈곤층으로 추락한 사람들은 삶의 의지를 잃어간다. 결국 가족이 해체되거나 균열상태에 이른다.

주말이면 가족끼리 손을 잡고 놀러가고, 가장 큰 걱정이 승진과 자식들 대학입학이었던 중산층의 생활이 이제는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지점장 출신 김모씨(53)는 퇴출 직후 채권추심사업을 시작했지만 동료들이 회사 돈을 횡령해서 도망가는 바람에 사업을 접었다. 김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5000만원을 빌려 줬던 처가와 부인 친구, 친척들도 이제는 싸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본다.

돈 문제로 부부끼리 험한 소리를 많이 주고받다 보니 가슴은 상처투성이다. 별거에 들어간 지 1년이 넘었다. 부인은 파출부로 일하며 한 달에 150만원가량을 벌어 자식들을 부양하고 있다.

45명 중 별거 중인 이가 6명이고 이미 이혼한 사람도 있다. 자식들이 결혼한 뒤 이혼을 하기로 합의한 부부도 있다.

자식들의 퇴출은 필연적으로 부모의 가정도 흔들어 놓는다.

퇴출된 장모씨(30)의 아버지는 아들의 부채를 고향 땅을 담보로 갚아주고 아들에게 18평 아파트 전세를 얻어줬다. 그러나 재혼한 부인은 “나와 상의도 없이 전처 자식에게 돈을 줬다”며 반발했고 아버지는 끝내 이혼했다.

2세들에 대한 정상적인 교육이 어려워지면서 일부 가정에서는 ‘빈곤의 세습화’의 조짐도 보인다. 퇴출 가정의 상당수 대학생들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로 학자금을 벌거나 군대를 갔다.

지점장 출신 이모씨(57)는 큰아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때에 퇴출을 당했다. 이씨는 아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공부를 마치고 대신 취직한 뒤 네 동생 학비는 책임지라”며 아파트를 담보로 빚을 내 2년간 유학비를 댔다. 그러나 작년에 귀국한 큰아들은 아직도 취직을 못했다. 결국 둘째는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갔다.

빈곤층으로 추락한 사람들은 집안이 기울고 부부간에 불화가 생기면서 자식들이 빗나가는 것을 볼 때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모든 스트레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도록 몰아간다. 전체 조사 대상자 중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32.3%. 빈곤층은 두배 가까운 60%(27명)나 된다.

新빈곤층 45명의 현재 상황

자영업(16명)비정규직(9명)실업(20명)
당시 직책지점장 3명, 차·과장 10명, 대리 이하 3명차·과장 3명, 대리 이하 6명지점장 6명, 차·과장 7명, 대리 이하 7명
퇴출당시 연평균 소득 5750만원4300만원5470만원
현재 연평균 소득514만원850만원대출, 부인의 부업, 부모의 도움으로 생활
퇴출 당시 자산평균2억6000만원1억2400만원2억5530만원
현재 자산평균250만원375만원8830만원
신용불량 경험 있다25%(16명 중 4명)33.3%(9명 중 3명)35%(20명 중 7명)
현재 직업공인중개사, 편의점, 인쇄소, 단란주점, 분식집, 제과점, 휴대전화대리점, 고철상, 건강기구 판매점 등 운영채권추심, 은행·제2금융권 대출영업직, 대리운전, 건강식품 영업직 등 근무

심각한 가족불화 겪었다(현재도 포함)56.2%(16명 중 9명)별거 중 2명77.7%(9명 중 7명)별거 중 1명65%(20명 중 13명)이혼 1명, 별거 중 3명
자살 생각한 적 있다62.5%(16명 중 10명)44.4%(9명 중 4명)60%(20명 중 12명)
설문대상자들의 퇴출 당시 평균연봉은 지점장 7300만원, 차장 6000만원, 과장 5000만원, 대리 4400만원, 행원 3300만원이었음.

▼특별취재팀▼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김상훈기자 sanhkim@donga.com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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