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가르침 주소 : http://silsang.co.kr/Kor/nature/nmain.htm
세상 속의 의문들과 삶 속의 문제들을 두고
누구도 말해 주지 않고,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그 해답을 찾는다.
누구나 질문하고, 함께 토론하고, 명쾌한 해답을 듣자.
- 편집부 -
질문 : 우리에게 왜 교육이 필요합니까?
답변 : 공학과 같은 것은 생활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교육은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큰 목표인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서 사람의 인격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질문 : 교육의 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변 : 교육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성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교육 혹은 직업교육이다.
교육의 참 목적은 인간에게 있는 일을 바로 이해하고 알리기 위해서 교육이 존재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있는 일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다. 만일에 교육이 있는 일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교육이 될 것이다.
우리사회를 보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공장에 가서 저임금을 받고도 일을 잘한다. 중학교만 나온 사람은 짜장면 배달도 잘하고, 야채 장사도 잘하고, 수레도 잘 끌고, 농사도 잘 짓는다.
문제는 고학력 자들이다. 고학력 자들은 머리만 잘 굴리려 하고, 일은 잘 하려 하지 않는다.
왜 남에게 의지를 하는가? 모든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보살필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
국가는 공정성 유지만 올바로 하면 개개인이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질문 : 인성교육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 인성교육의 목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인간사회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의 밝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현명한 활동과 판단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가 이상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누구도 이 행복과 평화를 얻는 길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이 말의 뜻은 법칙이고, 진리이고, 약속이고, 도이다.
우리는 이 뜻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교육이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러한 뜻에 의존해서 살아라."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국가가 침략을 당했을 때 국가에 큰 보탬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과 같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스스로가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미국의 카네기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세계의 강철 왕이 되어서 부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전기를 읽고 그를 동경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카네기처럼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교육으로 이 나라 젊은이들을 카네기처럼 만드는 것이다.
꿈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을지문덕이나 카네기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말한다. 이러한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옳은 일을 버리고 그른 일을 해왔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옳고 그름에 눈을 뜨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그릇된 일을 멀리 해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왜 그릇된 일을 멀리해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의존해서 살려던 나약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불안전하고 또 이 불안한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없는 것은 사회 환경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되었으면 그 잘못을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성교육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에 대하여 가르친다면 그 사회는 영원히 정의가 사라지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것은 사회를 지키는 길이고, 한 국가를 지키는 길이고, 그 민족을 번성시키는 길이다.
질문 :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답변 :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배워야 할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정의를 배워야 한다.
있는 일을 모르고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잘못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남이 나를 속여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현상을 가져다 주는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일을 알 때만이 우리는 있는 일을 축복할 수 있다. 우리가 있는 일을 정확하게 모르는 속에서 어떻게 있는 일에 대해서 축복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큰 공부는 사랑이고, 이 사랑은 바로 축복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자신을 축복하고 남을 축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왜 남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땅에 거름을 주는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내가 그 땅에 거름을 주고 좋은 땅을 만들었을 때 그 땅은 분명히 나에게 좋은 열매를 선사할 것이다.
내가 자신을 깨우치고 남을 축복하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환경을 좋게 만들므로 해서 그 사랑이 다시 사랑이 되어서 내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축복하므로 해서 우리 자신이 축복 받게 된다. 땅을 축복하면 그 땅은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준다.
내가 좋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내 자신을 좋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또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 일은 짝사랑이 되고 말 것이다.
상대를 축복하려 하다가 결국 자신이 그 일에 속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세상의 일을 하게 될 때 이러한 일은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질문 : 지혜와 지식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답변 : 지혜는 자기 속에 있는 시각으로 보는 것으로서, 시각이 열렸을 때 자기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고, 지식이라는 것은 남으로부터 들어서 쌓은 것으로서 그것을 응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가진 자와 지식을 가진 자와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는 잘못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지혜는 그 잘못을 알아보고 그 잘못으로부터 모든 것을 방어하고, 또 잘못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인재는 양성되는 것이지만 천재는 자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인재를 모아도 천재의 능력을 따라갈 수 없다.
천재는 지혜를 가지고 있고, 인재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없다면 그 지식은 인간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없다.
질문 : 사람들은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의 의식이 좋다 나쁘다 라고 말을 한다.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답변 : 의식이라는 것은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일으키는 기관을 말한다.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은 자기 속에 있었던 일이 쌓여서 하나의 의식을 만들고 그 자기 속에 있는 것의 움직임에 의해서 하나의 의식 자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 같은 일을 두고도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그 의식 속에 있는 것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보고 다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인간은 의식의 활동을 통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이 의식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이 의식 활동이란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言行)을 말한다. 자기 언행에 의해 자신의 의식 즉 영혼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식을 바꾸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자신의 언행을 바꾸면 된다.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 하나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은 깨닫는 것이다.
정신의 바탕은 깨달음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깨달음에 의해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의식 기관은 매우 단순하게 되어 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과거로부터 자기 속에 존재하게 된 것들이 자신이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의식 기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영향을 일으키는 것들은 하나의 활동을 통해 다시 하나의 의식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 근본과 바탕을 만든다. 근본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나온 씨앗의 근원을 말하고, 그 근원이라는 것은 과거세계의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이 근원은 하나의 생명체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식체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 의식체의 활동이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밖으로 나가서 활동을 하면 자기 속에 있었던 일이 다시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성격 즉 성질과 성품을 갖게 해서 현실과 부딪히게 되면 반응을 나타나게 된다.
깨달음이 없으면 이 근본은 변화하지 않는다.
하나의 식물의 예를 들어 보자. 콩의 경우에서 볼 때 바탕은 무엇일까? 그것은 환경이다.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까. 땅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바로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바탕은 무엇일까?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활동은 자기 속에서 나와서 계속 반복한다. 이 반복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의식체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의식체가 좋아지면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가 좋아진다. 사고나 행동이 좋아지면 사람의 삶이 좋아지고, 사람들의 삶이 좋아지면 사회가 좋아지고, 국가가 좋아지고 세상이 좋아진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의식이다. 사람들의 의식을 어떻게 깨우쳐 주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인간 사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내 속에 있던 말과 행동이 내 의식 작용에 매우 중요한 근본이 된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업을 만들고, 한을 짓고, 그리고 공덕을 만든다.
내가 말 한마디를 잘못할 때 시비를 유발하게 되고, 그 시비가 내 속에 한을 짓는 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며 나의 일시적인 행동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말 한마디가 남에게 한이 될 수도 있다.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하나의 깨달음을 주어서 그를 잘 살게 하고, 축복을 받게 했다면 그것은 큰사랑이 되는 것이다. 나의 행동이 어려운 사람을 구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있는 일을 보지 않고 말하지 말라.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말하라.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같은 말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있는 일을 보고 거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말은 어떤 경우에는 업을 지을 수도 있고, 갈등을 가져 올 수도 있고, 엄청난 재앙을 만들 수도 있다.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매스컴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또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도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의식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러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온 지는 오래 되었지만 현실적 국가나 사회 속에 의식개혁에 대한 어떠한 시스템도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 왜 이러한 중요한 일을 국가나 사회가 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의식을 개혁하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의 구조와 그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 개혁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의식은 세상의 일을 있게 하는 본체이다. 세상은 하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뜻은 좋은 것을 존재하게 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나쁜 것을 존재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있는 일을 모르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쓸모 없는 말, 모르는 말을 쉽사리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의식의 개혁은 무지를 개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지의 혁명이다. 무지에 대하여 사회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안이 있어야 한다.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겠다. 어떤 일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체와 대안이 없이 의식의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다.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 노자 이들은 4대 성인이다.
노자는 사람들을 만나서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대로 말을 해보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죽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일에 대한 항상 있는 일을 기준으로 해서 가르치고 깨우쳐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
왜 사람들은 두려워했는가? 그것은 그와 함부로 대화를 함부로 했다가는 자신의 위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자는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길거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깨우치려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면서 위선자들과 잘못된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것을 고치라고, 좋아지도록 충고하는 것인데, 잘못에 대한 충고는 의식을 개혁하고 무지에 대한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위선자들을 시기와 모함을 받아서 독약을 마셔야 하는 사형 선고를 받고 스스로 죽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말고 "너 자신을 통해 구원을 받으라."고 했다.
예수가 "자기 자신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은 그가 성인이라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에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유태교 신봉자들에 의해 극형을 당해야만 했다.
석가모니는 자유자재로 사람들과 접촉을 했지만, 그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보았던 세상의 일을, 들을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일생 동안 길을 걸으며 세상을 헤매다가 길에서 죽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일은 힘든 것이다.
어떻게 의식을 개혁할 수 있는가?
깨달음과 진실이 힘을 가졌을 때 그 사회의 의식을 개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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