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구름너머 2004. 11. 29. 12:54

허해구 선생님의 "진실의 근원"사이트에 올려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http://heu3339.netian.com/==> "새글"게시판

좀 더 많은 진실의 글을 보시고 싶은 분은 꼭 "진실의 근원" 사이트를 방문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 불교의 초기변천과정

그러면 초기의 불교가 변천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시점에 불교는 두가지 내외적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인 문제점은 부처님의 엄한 가르침을 벗어나고자 하는 제자들의 일탈성이었으며
외부적 문제점은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고래의 힌두적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일이지만 부처님 재세시에도
자주 법을 거역하는 제자들이 나와 법을 훼손하는 일이 있었고
외도들과의 충돌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처님 사후 제자들이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힌두적 관념에 젖은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자연스레 그들의 논리를 활용하게 되었고
자연히 불법 속에 힌두적 관념과 논리가 스며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사후 약 200여년이 지나 처음 문자로 경전이 편찬되었는데
이때까지 10여대를 거쳐 입으로 입으로 법을 전해들은 후대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경전 속에 집어넣게 되었고
부처님의 법은 많이 변형되게 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도 한 다리만 건너가면 말이 왜곡되는데
그 당시 글도 없는 상태에서 10여 세대를 지나면서 구전된 법이
어찌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인지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이 사람들을 만나 행한 질문과 답변 속에
관련된 사실과 이치를 모두 집어넣어 완벽한 문장과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조금의 흠도 없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초기 경전의 내용이 복잡하고 나열적이며 관념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기울인 노력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초기 제자들의 법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이들은 불교를 완벽한 교리를 갖춘 종교로 만들어 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현학적이고 번쇄한 교리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지고 형식화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잡아함이나 법구경과 같이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아비달마적 연구가 고조되어
그 내용이 부가되고 인위적으로 편집되어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인 경전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팔리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 ya)'에 속하는 《닛데사》는
같은 소부에 수록된 《숫타니파타 Suttanip ta》에 비해 매우 아비달마적인 주석이며
역시 '소부'에 속하는 《파티삼비다맛가 Pa isa bhid magga》는
실천수행의 덕목을 정리하여 해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내용을 지녀
때에 따라서는 논장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될 경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초기 법음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남방의 팔리어 경전도 이 정도일진데
북방으로 전래된 카니시카왕의 산스크리트 경전의 경우는 그 변질성은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불경편찬의 역사와 부파불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BC 485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비탄에 빠졌으나
일부 습이 많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었던 절대적 진리와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일탈성과 아만심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삶은 업이 모두 사라진 청정한 삶이었기에
세속의 집착과 업의 유혹에 시달리며 옆에서 시봉하는 제자들은
부처님의 티끌하나 없이 맑고 완전한 해탈지경을 견디기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처님은 워낙 맑아 세상의 어둠들을 남김없이 보셨기에
눈이 어두운 제자들이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을 하면
그들을 위하여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러다 하며 일일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간섭은 업이 많고 앞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일언반구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였고
질식할 것 같은 권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닷다는 라는 제자는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비탄에 빠진 수행자들을 향해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들은 드디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하는 석존의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수제자인 마하 가섭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교단은 뿔뿔이 갈라져 버릴 것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이들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도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불전결집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사후 바로 벌어진 제1회 불전결집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수제자인 마하가섭이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으며,
우팔리가 지켜야할 계율(律)을, 아난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을 암송하면
참석했던 모든 제자들이 그 내용이 맞음을 전원일치로 승인하여
경으로 확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립된 율과 경의 내용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속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200년 뒤에 3차 팔리어 대결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2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 약 100년 후에 있었는데
이 시기는 불교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으로
입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적인 상황에 따라
초기의 엄격했던 계율이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엄격한 승가교단과 새로운 지역의 신생교단 사이에
변질된 계율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에서 10가지 계율상의 쟁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 주요한 내용으로는,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식사 시간을 연장하는 관행의 문제,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금,은(을 받는) 관행 등이 용납될 수 있느냐 문제 등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계율을 융통성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의 비구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비구들간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보수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인정되어,
10사는 모두 '비사(非事)'로 판정되었습니다.

이때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대중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근본분열에 의해 갈라진 교단은
불멸 후 200년(BC 280년 경) 무렵에는 개방적인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습니다.

한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BC 180년 경)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胄部) ·정량부(正量部) ·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와 경량부(經量部)가 나뉘어졌습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하는데
이들은 각 부파별로 독자적인 이론 전개를 해가며 인도불교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계속 불교를 연구하고 정밀화, 체계화시키며 빈틈없게 만들어
인도전역에 불교를 전하게 되는데 그 결정판이
AD 5세기에 나온 세친의 구사론입니다.

그러면 BC 235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때 이루어진
3차 대결집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불멸후 250년 동안 입을 통하여 구전(口傳)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이
이때 비로소 문자화되었는데 그동안 부파불교에서 수백년간 연구되어온
아비달마의 방대한 논리들이 논장(論)으로 정리되어
대장경이 경·율·논 3장(三藏)으로 편찬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전하고 있는 불교는 부처님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말씀하신 원음이 아니라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위상에 맞게 가공한 것으로

부처님을 신성하고 완벽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한마디 말이라도 그속에 완전한 뜻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하여
흠이 없도록 보완하고 부연하여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바로 이 경이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지금의 팔리어경전의 기초를 이루었는데
이때는 상좌부의 분열이 이루어지지 않고 힌두교가 정식으로 나타나기 전이라
비록 많이 변질되기는 하였지만 부처님의 원어가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소카왕 사후 바로 마우리야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샨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브라만적인 성격을 부활한 복고적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산스크리트 문법을 최종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를 대표하고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문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마누 법전] 의 제작(B.C.1 세기)으로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의 권위에 포괄하여 흡수하고
선진종교인 불교의 이론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습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 뿐만 아니라 상좌부도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힌두교의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부처님을 신앙하는 대승불교도 나타나게 됩니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인도북부에 생긴 중앙아시아 계통의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택하고 AD 125년 경 대대적인 4차 결집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7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그 당시 위정가들에게 차원높은 고급종교로서 인정받았으며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위해 불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카니슈카왕은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500명의 스님을 선출하여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4회 불전결집(第四回結集)'입니다.

이때는 각부파의 아비달마 논의가 거의 완성된 상황이라
기존 팔리어 삼장에다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광범위한 주석을 덧붙여 경을 편찬했습니다.

이때 경장주석 10만송, 율장주석 10만송, 논장주석 10만송, 도합 30만송의 대주석을 만들고
동판에 새겨 석합에 넣고 큰 보탑을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 논장의 주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경은 팔리어로 쓰여진 3차 경전과는 다르게
힌두 귀족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데
그만큼 인도의 문화와 힌두교의 영향력이 반영되었다는 뜻이며
이 경전들이 북방으로 전해져 한역대장경의 원전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이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힌두교의 영향과 각 부파불교의 논리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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