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구름너머 2004. 11. 29. 12:54

허해구 선생님의 "진실의 근원"사이트에 올려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http://heu3339.netian.com/==> "새글"게시판

좀 더 많은 진실의 글을 보시고 싶은 분은 꼭 "진실의 근원" 사이트를 방문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 불교의 초기변천과정

그러면 초기의 불교가 변천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시점에 불교는 두가지 내외적 문제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인 문제점은 부처님의 엄한 가르침을 벗어나고자 하는 제자들의 일탈성이었으며
외부적 문제점은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고래의 힌두적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일이지만 부처님 재세시에도
자주 법을 거역하는 제자들이 나와 법을 훼손하는 일이 있었고
외도들과의 충돌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처님 사후 제자들이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힌두적 관념에 젖은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자연스레 그들의 논리를 활용하게 되었고
자연히 불법 속에 힌두적 관념과 논리가 스며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사후 약 200여년이 지나 처음 문자로 경전이 편찬되었는데
이때까지 10여대를 거쳐 입으로 입으로 법을 전해들은 후대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경전 속에 집어넣게 되었고
부처님의 법은 많이 변형되게 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에도 한 다리만 건너가면 말이 왜곡되는데
그 당시 글도 없는 상태에서 10여 세대를 지나면서 구전된 법이
어찌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인지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이 사람들을 만나 행한 질문과 답변 속에
관련된 사실과 이치를 모두 집어넣어 완벽한 문장과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부처님은 완전하신 분이니
조금의 흠도 없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초기 경전의 내용이 복잡하고 나열적이며 관념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기울인 노력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초기 제자들의 법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부파불교(아비다르마)라고 하는데
이들은 불교를 완벽한 교리를 갖춘 종교로 만들어 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현학적이고 번쇄한 교리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지고 형식화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잡아함이나 법구경과 같이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아비달마적 연구가 고조되어
그 내용이 부가되고 인위적으로 편집되어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인 경전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팔리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 ya)'에 속하는 《닛데사》는
같은 소부에 수록된 《숫타니파타 Suttanip ta》에 비해 매우 아비달마적인 주석이며
역시 '소부'에 속하는 《파티삼비다맛가 Pa isa bhid magga》는
실천수행의 덕목을 정리하여 해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내용을 지녀
때에 따라서는 논장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될 경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초기 법음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남방의 팔리어 경전도 이 정도일진데
북방으로 전래된 카니시카왕의 산스크리트 경전의 경우는 그 변질성은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불경편찬의 역사와 부파불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BC 485년)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비탄에 빠졌으나
일부 습이 많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었던 절대적 진리와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일탈성과 아만심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삶은 업이 모두 사라진 청정한 삶이었기에
세속의 집착과 업의 유혹에 시달리며 옆에서 시봉하는 제자들은
부처님의 티끌하나 없이 맑고 완전한 해탈지경을 견디기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처님은 워낙 맑아 세상의 어둠들을 남김없이 보셨기에
눈이 어두운 제자들이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을 하면
그들을 위하여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러다 하며 일일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간섭은 업이 많고 앞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일언반구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였고
질식할 것 같은 권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닷다는 라는 제자는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비탄에 빠진 수행자들을 향해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들은 드디어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하는 석존의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수제자인 마하 가섭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교단은 뿔뿔이 갈라져 버릴 것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이들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도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불전결집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사후 바로 벌어진 제1회 불전결집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수제자인 마하가섭이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으며,
우팔리가 지켜야할 계율(律)을, 아난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을 암송하면
참석했던 모든 제자들이 그 내용이 맞음을 전원일치로 승인하여
경으로 확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립된 율과 경의 내용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속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200년 뒤에 3차 팔리어 대결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2차 결집은 부처님 사후 약 100년 후에 있었는데
이 시기는 불교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으로
입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적인 상황에 따라
초기의 엄격했던 계율이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엄격한 승가교단과 새로운 지역의 신생교단 사이에
변질된 계율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에서 10가지 계율상의 쟁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 주요한 내용으로는,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식사 시간을 연장하는 관행의 문제,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금,은(을 받는) 관행 등이 용납될 수 있느냐 문제 등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계율을 융통성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의 비구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비구들간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보수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인정되어,
10사는 모두 '비사(非事)'로 판정되었습니다.

이때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대중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근본분열에 의해 갈라진 교단은
불멸 후 200년(BC 280년 경) 무렵에는 개방적인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습니다.

한편 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BC 180년 경)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胄部) ·정량부(正量部) ·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와 경량부(經量部)가 나뉘어졌습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하는데
이들은 각 부파별로 독자적인 이론 전개를 해가며 인도불교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계속 불교를 연구하고 정밀화, 체계화시키며 빈틈없게 만들어
인도전역에 불교를 전하게 되는데 그 결정판이
AD 5세기에 나온 세친의 구사론입니다.

그러면 BC 235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때 이루어진
3차 대결집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불멸후 250년 동안 입을 통하여 구전(口傳)되어 오던 부처님 말씀이
이때 비로소 문자화되었는데 그동안 부파불교에서 수백년간 연구되어온
아비달마의 방대한 논리들이 논장(論)으로 정리되어
대장경이 경·율·논 3장(三藏)으로 편찬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전하고 있는 불교는 부처님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말씀하신 원음이 아니라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위상에 맞게 가공한 것으로

부처님을 신성하고 완벽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한마디 말이라도 그속에 완전한 뜻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하여
흠이 없도록 보완하고 부연하여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바로 이 경이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지금의 팔리어경전의 기초를 이루었는데
이때는 상좌부의 분열이 이루어지지 않고 힌두교가 정식으로 나타나기 전이라
비록 많이 변질되기는 하였지만 부처님의 원어가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소카왕 사후 바로 마우리야 왕조는 붕괴되고 안드리아 왕국과 쿠샨왕조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브라만적인 성격을 부활한 복고적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산스크리트 문법을 최종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를 대표하고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문화를 이끌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마누 법전] 의 제작(B.C.1 세기)으로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의 권위에 포괄하여 흡수하고
선진종교인 불교의 이론을 흡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원형을
이 시기에 정립했습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정립은 기존 불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대중부 뿐만 아니라 상좌부도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힌두교의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부처님을 신앙하는 대승불교도 나타나게 됩니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인도북부에 생긴 중앙아시아 계통의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택하고 AD 125년 경 대대적인 4차 결집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7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서를 가진 불교는
그 당시 위정가들에게 차원높은 고급종교로서 인정받았으며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위해 불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카니슈카왕은 부파불교 내에 여러 파가 있고, 각 부파의 교의가 동일하지 않음을 알고
각 부파의 이설(異說)을 통일하고자 경·율·논 3장에 통달한 500명의 스님을 선출하여
결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4회 불전결집(第四回結集)'입니다.

이때는 각부파의 아비달마 논의가 거의 완성된 상황이라
기존 팔리어 삼장에다가 이들이 만들어 놓은 광범위한 주석을 덧붙여 경을 편찬했습니다.

이때 경장주석 10만송, 율장주석 10만송, 논장주석 10만송, 도합 30만송의 대주석을 만들고
동판에 새겨 석합에 넣고 큰 보탑을 세워 그 속에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 논장의 주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경은 팔리어로 쓰여진 3차 경전과는 다르게
힌두 귀족들이 사용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데
그만큼 인도의 문화와 힌두교의 영향력이 반영되었다는 뜻이며
이 경전들이 북방으로 전해져 한역대장경의 원전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700년간에 걸친 부파불교의 이론이 반영된 카니시카왕의 4차 결집의 산물로서
힌두교의 영향과 각 부파불교의 논리들이 많이 반영된 것이니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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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11. 1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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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변천사



지금 우리들은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속에서

수천년간 대승불교적 전통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배우고 생활화해왔던 대승불교를

당연히 부처님의 정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교도들이 느끼는 바이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세상을 이끄는 정신적 등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자들을 수동적이고 염세적으로 이끌며

기복종교로 그치고 있습니다.



선승들은 삶에 도움이 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화두만 되뇌이고 있는가 하면

학식높은 스님들은 도의 실체가 세상의 은원과 옳고 그름마저 벗어난

공한 것이라는 관념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여

뜻모를 '할!'만 외치는 선불교와 대승불교의 관념성과 비현실성에서 깨어나

구체적인 삶에 도움이 되는 실상의 이치를 주로 하는

근본불교로 돌아가자는 소리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은 뜻있는 젊은 스님들과 불자들 사이에

점점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많은 각자와 선사들이 나왔지만

부처님의 정각을 넘어선 이가 나온 적이 없으며
부처님과 같이 우주의 실상을 밝히고 인과의 이치를 밝힌 분이 없다는 점에서

그 호소력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권위와 교리 속에 묻혀 지내던 사람들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현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진법이며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현실에 맞게 적응 발전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한 때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불법은 너무나 깊고 오묘해

단순한 도덕적인 교훈을 전하는 소승에 그칠 리가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법이 대승불교 속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커져가는 의혹은

유일한 정각을 얻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으며

불자들의 삶이 염세적이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이 환상과 거짓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생에 대한 자비심과 공덕행으로 가득찬

부처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분이 유일한 정각을 이룬 분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불교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많은 수행의 체험과 깨달음의 인연을 통해

마침내 부처님의 불법이 크게 변해왔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기에 이를 밝히니

부디 이러한 사실이 진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부처님의 참법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겠습니다.



불교이론에 삼시교판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분류는 유식학을 석존의 교설 중에서 최상의 법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도 유식학파의 계현(戒賢, Silabhadra)논사가 정립한 이론으로서

제1시 유교(有敎)· 제2시 공교(空敎)·제3시 중도교(中道敎, 唯識敎)의 순서로

불법이 나타났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비슷한 분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불교학자들은

부처님 초기 가르침이 존재하는 사실에 기초해 그 이치를 밝히는

사실교(有敎)였다는 사실에는 모두 공감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즉 유교(有敎)란 말 그대로, 있는 사실에 기초한 가르침으로서,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실상과 실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치를 밝힌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부처님은 업이 사라진 해탈한 맑은 마음으로

우주의 진실을 보고 그 속에 흐르는 이치를 밝힘으로써

세상사람들이 사실과 부합된 참된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불행과 고통이 없고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알고

세상에 흐르는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은 진실이니

이에 기초하여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이며



세상에 없는 환상이나 실상에 어긋난 그릇된 말을 가르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비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사실을 사실대로 본 것이며

그 가르침은 사실과 일치한 진리였기에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면 어김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라 하고 부처님을

정각을 이룬 성자라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시 브라만교의 환상적인 관념과 미신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둠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고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영원한 법칙을 가르침으로써

무지와 삿된 욕망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은 세상의 참된 실상과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를 드러내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팔십평생 동안 하신 일은 세상의 진실과 이치들을 밝혀

눈이 어두운 중생들이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한 것뿐입니다.



그 가르침의 요체는 우주의 참된 실상과 인과의 법칙,

세상을 축복하는 좋은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고 인과의 이치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에 따라 좋은 원인을 지으면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좋은 원인을 지을 수 있고 좋은 결과를 얻어

지상극락을 이루고 인간완성인 해탈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습은

그대로 우주의 진리가 스며있는 경전이었으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게 되면 진리의 법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설한 사실에 관한 법(有法)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눈에 보이고 인연에 닿는대로

이러한 현상은 이러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지고

저러한 원인을 지으면 저러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이치를 밝혔습니다.



부처님의 해탈심에 비치는 실상의 이치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같습니다.



부처님은 생각으로 법을 만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사실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이치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며, 사실만을 말하며, 진실만을 말하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아함경에 여러 장소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한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이 같은 현상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이치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항상 똑같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이 이러한 사실에 관한 법 이외에

근기가 높은 제자들을 위해 세상이 공한 이치를 남겼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초기 경전에는 인과의 이치와 실상의 세계 이외에는

다른 것을 가르친 것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자연의 경전에서 사실적인 모습과 이치 이외에

다른 초월적인 뜻과 이치가 존재하는 것을 보셨다면

반드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며

초기 경전에 그런 내용이 반드시 남아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시며

하나의 현상에 대해 두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한 이치가 실상 속에 존재하는 이치라면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상좌부에서

대승경전이 나왔을 때 그러한 공한 이치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고

부정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불교에서는 공한 무루의 이치에서는

선업이나 악업, 옳고 그름도 모든 인간의 환이며 착각에 불과하니

모든 구별을 던져버리고 실상이 공함을 깨쳐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상이 본질적으로 공하며

인과의 이치가 모두 헛되다는 이야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됩니다.



부처님은 수행의 정법으로 바른 이치를 보고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업을 지어

바른 마음을 얻고 해탈을 얻는 팔정도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생에서 바른 법과 바른 마음을 얻으면

후생에는 반드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수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른 이치와 올바르게 살아가는 선업의 유효성이 분명한데

갑자기 모든 선악과 분별의 이치를 버리고

공한 것을 깨닫기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실에 관한 인과법을 왜곡하는 관념적 희론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장 경계한 것은 이와 같이 존재하는 사실을 벗어난 관념과 논리였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말을 무기라고 하여 진리를 찾고 자신을 닦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장 뒤에는 힌두교의 염세적 사고방식과

세상을 환이며 공이라 보는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도의 브라만 신앙은 이 세상은 본래 맑고 순수하고

전지전능한 브라만(신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우주적인 무지, 환술, 속임수(마야)의 힘 때문에

다양한 형상으로 전개되는 것이지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선이나 악이라는 것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신들도 선업을 지어 천상에 난다 하더라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출가 유행(遊行)과 고행, 요가로 세상이 공한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관념이 부파불교의 이론화와 대승불교의 관념을 통해

불교로 스며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불교는 사실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관념적인 논리만 외치게 되었으니

불교를 믿는 나라에서 바른 이치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환상과 무지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초기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이 사라진 맑고 순수한 해탈지심으로 세상을 보고

이치를 밝히며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옆에서 시봉하는 제자들은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며 같이 행동하니

자연히 마음속에 있던 업이 작용하지 못하고 힘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세세생생 변치않을 맑은 지혜와 정견을 얻어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이 팔십평생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법을 밝히신 모습이 팔정도의 전형인 것이며

제자들을 해탈에 이르게 하는 가장 올바른 수행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수천년동안 수많은 구도자들이 거친 산야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헤매였으나

정각을 얻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참된 깨달음의 빛과 업을 잠재울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전해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빛이 있는 곳에서는 그 속에 머물기만 하면

빛의 은총에 젖을 수 있으나

진리의 빛이 사라진 곳에서는 아무리 혼자 노력한다 해도

진리의 광희를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경에 보면 정법 500년 상법 1000년, 말법 1만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법의 시대는 법이 있고 깨달은 자도 나오며

상법의 시대는 수행자는 있어도 깨닫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말법시대에는 올바른 가르침도 없고 실천도 해탈도 어려운 시기라고 합니다.



그동안 세상이 밝아지지 아니하고 깨달은 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상법시대와 말법시대 속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 이유는 바로 불법이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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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11. 19. 10:01

앞으로 게시하게될 내용은

허해구 선생님의 "진실의 근원"사이트에 올려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http://heu3339.netian.com/==> "새글"게시판

좀 더 많은 진실의 글을 보시고 싶은 분은 꼭 "진실의 근원" 사이트를 방문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나도 한때는 불교의 교리를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으며,

현재도 그러한 바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말 진실한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에 대한 허해구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길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래는 뜻으로 여기에 옮겨 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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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10. 5. 20:18

1. 태양계의 모든 행성은 타원궤도로 공전합니다.

2.지구는 우리나라의 겨울철때 태양에 가장 가까히 접근합니다

3. 달은 점점 더 지구에서 멀어진다.?조금씩

지구와 달의 운동 : http://www.scienceall.com/sa0educ/01/02e/view_121567.jsp?selMenu=ab

태양계 3차원 모델링 : http://hanol.ms.kr/tsan/solar_system/solar_system1.htm

태양계의 실제 크기 : http://www.scienceall.com/sa0educ/01/02e/view_121574.jsp?selMenu=ab

지구의 반지름 구하기 : http://www.scienceall.com/sa0educ/01/02e/view_121555.jsp?selMenu=ab

달의 반지름 구하기 : http://www.scienceall.com/sa0educ/01/02e/view_121554.jsp?selMenu=ab

태양의 반지름 구하기 : http://www.scienceall.com/sa0educ/01/02e/view_121553.jsp?selMenu=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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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10. 5. 19:34

아래는 네이버에서 퍼온글입니다.

지구는 초속 약 460m의 속도로 자전하면서 초속 약 30㎞의 속도로 태양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자전의 뚜렷한 증거는 낮과 밤.

지구의 자전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한다.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북극점 위 높은 곳에서 지구를 관찰하면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지구 위도에 따라 지표면의 회전속도는 다르다.

적도부근에서는 아주빠른 속도로 지구표면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극지방에서는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이는 큰시계 바늘의 안쪽은 느리게 바깥쪽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지구가 빠르게 자전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지구상의 모든 물체에는 중력이 작용하고 있고 대기층이 지구와 함께 회전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물체에는 만유인력과 함께 자전에 의해 작지만 원심력이 함께작용한다.

원심력은 물체가 회전할 때 생기는 힘으로 회전중심과 반대방향으로 즉,지구의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작용한다.

중력은 만유인력과 원심력의 합.

만유인력은 극지방이나 적도지방이나같지만 원심력은 적도지방에서 최대이기 때문에 중력이 최대인 지점은 바로 극지방이 된다.

같은 물체의 무게를 잰다면 극지방에서 무게가 더 많이나간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순간 햇빛을 받던 쪽은 낮이 계속되고, 반대쪽은 계속 밤만 될것이다.

낮이 계속되는 곳은 온도가 섭씨 70~80도까지 올라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밤이 계속되는 곳은영하 100도 이하로 내려가서 모든 것이 꽁꽁 얼어 붙어 빙하시대가 도래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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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10. 2. 13:43
1. 북극성 고도가 위치에 따라 다르다
2. 먼 바다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배는 돛대부터 보인다
3. 월식 때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면 둥글다
4. 태양이나 달이 뜨는 시각이 동쪽으로 갈 수록 빠르다
5. 지표면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사람이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진다
6. 어느 한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면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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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8. 12. 12:44

세상을 보는 눈


--진실의 근원-세상을 살리는 길에서 퍼옴..


청운의 꿈을 품고 세상을 경륜하고자 하는 자가 무엇보다
우선해서 가져야 할 것이 바로 세상을 보는 눈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없이 세상에 뜻을 펼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눈먼 새가 대륙을 건느려고 하는 것과 같다.

세상을 보기 위해서 먼저 세상속에 깃들어 있는
이치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논리를 배우고 사물의 인과를 고려하는 것은
이세상이 완벽한 인과의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것이다.



만약 세상이 인과관계를 벗어나
무질서하고 무의미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우리들의 사고는 아무런 의미없는 것이 되며

수많은 방침과 정책들은 아무런 결과없는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성을 발달시키고 논리를 배우며
인과관계에 따른 많은 원인행위를 하는 것은
현상들이 완전한 인과의 법망속에 나타나고 있으며

어떠한 원인은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온전한 조화속에 있는 우주법계의 의미성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을 경륜하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본래구조나 우리의 이성적 사고논리 자체가
세상을 하나의 의미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세상을 하나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하나로 보는 시각을 가질 때
그를 비로소 세상에 눈이 뜬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잡다한 사회현상들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조정하고 통할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이 하나로 보일 때
모든 물질과 생명이 서로 조화되며 작용하고 있고

삶과 죽음의 교류속에서 영원한 순환과 지속을 거듭하며
의미의 계속성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사르트르는 즉자라는 용어로 표현했고
불교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는 어떠한 변화를 겪어도
여여한 실상이 불변일 뿐이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돌고 도는 영원한 지속이 아무런 의미없이 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미성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세상이 영원한 순환속에서 지속하는 것은
완전성과 의미성을 전제로 하여 돌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보일 때 그에게는 모든 생명과
우주의 조화에 대한 신비성에 눈이 뜨이고
모든 숨은 뜻이 살아서 다가오게 된다.



현상을 보고 그에 깃들어 있는
인과의 이치를 느낄 수 있을 때
그는 세상과 하나된 사람이라 하며
세상과의 일치감 속에서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세상을 놓고
잣대를 잴 수 있는 인물이 된다 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눈은 깜깜인 체 출세와 욕망의 도구로서
세상을 움직여 보려 하나,

진정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생의 공덕을 안고 세상에 태어나 정신이 맑고 깨끗하여
후생에 날때부터 생이지지하여 사물을 볼때마다

그이치가 밝게 드러나는 사람만이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인간의 정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도 이와같이
끝없는 순환을 통하여 자신을 생을 이어나가며
이윽고 우주속에 나타난 자신의 생명의 뜻을 완성시킨다.



공자는 이를 일러 날 때부터 아는자를 최상자라 했고
배워서 아는 자가 그 다음이며
배워도 모르는 자는 그다음이고
배울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최하자라 했다.


이것은 세상을 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우주적인 통찰인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잘못된 관습과 세속적인 가치에 얽메여
한과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후생에 태어나는 생명은 그정신이 깨끗하지 못하여
항상 끈적끈적한 애욕의 연기에 의해
불행한 삶의 고리를 돌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순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속에 머물고 있는 업이 나타나
현재의 삶을 결정짓고 있는 것을 깨달아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잘 가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일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속에 한번 생겨난 일도 또한
저절로 사라지는 일이 없이
현상과 부딪히면서 새로운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따라서 우리는 나쁜 원인을 짓지 말고 경계해야 하며
좋은 원인을 많이 지을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주변을 돌고 있는 나쁜 원인을 외면하면서
설마 우리에게 불행이 닥칠 것인가 하고
요행수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나쁜일을 하며
대수롭지 않고 질서를 어긴다.



세상에 인과의 이치가 엄연하다면
그러한 나쁜 원인들은
반드시 우리에게 불행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필연의 법칙인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정신이 흐리다는 것이며
우리사회에 정의와 양심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물질과 쾌락의 노예로 전락한 상태이며
현대문명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가치로서 살펴볼 때
극도로 타락하고 저급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현대문명이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물질과 쾌락의 량을 문명의 척도로서
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본주의 물질문화가
오히려 인류의 미래를 망치고
인간들을 애욕의 노예가 되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망친다는 것을 생각다면
현대문명은 혁명적인 대전환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현대문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영원히 돌고 도는 인과의 이법을 받아들여
밝은 이치와 좋은 원인을 짓도록
노력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진리를 두려워 할 줄 아는 양심과
세상을 생각하는 용기와 사랑이 있을 때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으며
현대문명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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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4. 8. 12. 12:31

진실의 근원 홈피입니다.

인생에 궁금한점이나 진리에 대해

알고픈 사람들은 한번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heu3339.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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