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구름너머 2005. 11. 17. 09:27

을사조약을 말함이나 을사년에 체결된 굴욕적인 조약을 말함이다.

한일합방을 경술국치라 말하듯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정확히 알고 용어도 제대로 써야 하겠다.

을사늑약에 대한 배경 설명이 있는 곳: 대한제국황실복원추진위원회 http://blog.paran.com/srkr/3537717

중앙일보 : http://news.joins.com/en/200511/15/200511151930567071c000c030c031.html

동아일보 : 아래

====================

을사늑약 100년…“日강압으로 을사늑약 체결”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린 한규설의 증언을 보도한 1930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말정객의 회고담-미랭시(未冷屍)에 유하언(有何言)’이라는 제목과 대한제국 대신 차림의 한규설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7일은 을사늑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은 그동안 여러 자료와 증언을 통해 밝혀져 왔다. 특히 일제의 강압 통치가 한창이던 1930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신년특집호 2면에 실린 한규설(韓圭卨)의 증언은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임을 명백히 폭로했다. 1905년 11월 17, 18일 을사늑약 체결 당시 참정대신(내각 서열 2위, 당시 총리 역할 수행)이던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25년간 두문불출하다가 본보 지면을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시의 강압적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지금에 죽은 사람을 찾아와서 무슨 들을 말이 있겠소. 아직 말은 하오만은 ‘미랭시(未冷屍)’이지요. 식지 않은 송장과 다름이 있겠소. 을사년 이후 말도 않고 듣지도 않으려 하였더니 요새는 귀도 멀고 눈도 어둡게 되었으니 아주 송장이 되려는가 보오. 입이 아직 성해 말은 하오.”

한규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방한한 1905년 11월 9∼18일에 이르는 급박한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당시 모든 대신이 조약 체결에 반대한다는 결의를 다졌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약이 체결됐음을 증언했다.

“17일 일본공사관에 불려갔다가 다시 궁중으로 돌아와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은 도장을 생명과 교환할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이 사이 일본 외교관과 군인들이 무수히 내전 가까이 들어서 형세가 매우 절박했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거절만 능사가 아니라며 조문 수정을 요구하자고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아 회의가 혼란에 빠졌고 폐하는 내전으로 들어가셨다.



이토가 다시 나타나 조약 체결을 강요했는데 나는 만민공론에 부치자는 이유로 기일을 연기함이 좋겠다는 생각에 폐하를 만나러 회의장을 빠져나왔으나 일본통역관에 의해 다시 이토에게 끌려갔다. 이토의 요구를 다시 거절했더니 일본사관들이 문을 지키고 나를 다음 날 오전 1시 반까지 수옥헌의 마루방에 가뒀다. 그 사이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어 줬다는 말을 듣고 통곡했다. 나는 외부대신이 동의해도 총리대신의 동의를 얻어 연서(連署)로 상주(上奏·왕에게 올림)해 재가를 얻지 않으면 무효임을 잘 알아 법부대신과 탁지부대신을 제하고 전부 면관시킬 수속을 했다. 그러나 그 이튿날부터 벌써 딴 세상이 됐다. 어전에서 소행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죄목이 붙어 내가 면관되고 3년의 유배를 보낸다는 칙명이 내려졌다.”

‘한말 정객의 회고담’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연재된 한규설의 증언은 이후 을사늑약이 강압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됐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관련 소식을 일본에 전했던 ‘조선통신’은 한규설의 증언을 보도한 본보 기사를 그대로 일본어로 번역해 1930년 1월 14∼17일 보도했다. 최근 국내 한 신문은 조선통신의 이 기사를 인용해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 수행됐음을 거듭 입증하는 자료가 100년 만에 발굴됐다’고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기도 했다.

광복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는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이 1951년 7월 25일∼8월 1일에 본보에 연재한 ‘대일강화조약안의 재검토’ 기사였다. 이후 을사늑약에 대한 연구는 1992년 5월 서울대 이태진(李泰鎭) 교수가 을사늑약 원문에 조약의 명칭이 빠져 있고, 황제 비준에 관한 문서가 없음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어 1993년 10월 24일에는 미국 컬럼비아대 귀중본도서관에서 고종이 호머 B 헐버트를 통해 9개국 국가원수들에게 을사늑약이 원천 무효임을 알린 영문 친서가 발견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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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은 무효다
일본의 강압을 입증하는 문서 공개


글:강동완 http://www.onekorea.info


1905년 11월에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일본측의 무력을 동원한 압력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두 개의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당시 주한 미국 공사였던 에드윈 모건(Edwin Morgan)이 미국무장관 엘리후 루트(Elihu Root,)에게 보낸 보고서, 또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전쟁 보고서다.

이 두개의 보고서는 12일 열렸던 한 심포지엄에서 일본 스루가다이(駿河台)대학 명예교수인 아라이 신이찌(荒井信一) 교수의 발표에 의해 밝혀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게 1905년 11월 17일이었으므로 몇일 있으면 꼭 100년이 된다. 일본에서는 제2차 한일협약으로 불리고 있지만,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화를 목표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힘을 동원해 강제로 맺은 굴욕적인 조약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을사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법적 유효성을 주장해서 논란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라이 명예교수가 발굴한 자료인 1905년 11월20일 모건 주한 미국공사가 루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모건 주한 미국공사는 보고서에 "일본 특명 전권대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주한 일본군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사령관이 함께 미 공사관으로부터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20여 미터 떨어져 있는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모습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일본 헌병 등이 회의실의 베란다 및 하나 밖에 없는 뒷문 통로를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헌병이 공식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경호를 위해 배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황제에게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방편도 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당시 서울 시내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무력시위와 관련해서는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료 등이 조약을 조인할 때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미 외교관과 본국이 교환한 공식 문서를 모은 미국의 연구서「한미관계(Korean American Relations)」 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아라이 명예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역시 이와 같은 강압을 입증하는 일본 육군의 보고서도 발견이 되었는데, 「메이지 37년·38년 전쟁 육군 정사(明治三十七八年?役陸軍政史)」라는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은 조약에 반대하는 대한제국 각료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헌병을 동원해서 동정을 감시했다고 한다. 또한 대한제국의 군부 대신을 불러 "최후의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하지 않겠는데…"라며 몇 마디 말로 협박하자 무서워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그리고 서울에 보병부대나 포병대대 등을 배치한 목적을 치안유지 외에 각료의 도주 방지와 시위진압을 들고 있다.

아라이 명예교수는 이와 같은 일본측의 행위는 '사실상의 감금'에 다름없는 행위였고, '권총을 들이댄 것과 같다'라며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지적했다.

posted by 구름너머 2005. 10. 18. 09:46
제주서 관측된 부분월식.
[연합뉴스 2005-10-17 21:44]

17일 오후 9시를 전후해 제주시 노형동 3층 옥상에서 관측된 부분월식. 300㎜ 망원렌즈를 사용해 오후 9시부터 9시 12분까지 2-3분 간격으로 다중노출 촬영했다. - 한국관광공사 제주지사 강경오씨 제공 - /지방/날씨/과학 2005.10.17. (제주=연합뉴스) dshong@yna.co.kr (지방 )

posted by 구름너머 2005. 10. 18. 09:45
서울서 관측된 부분월식


서울서 관측된 부분월식
【서울=뉴시스】

17일 저녁 9시를 전후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부근에서 관측된 부분월식의 모습을 400㎜ 망원렌즈를 사용해 연속촬영 후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여 한장으로 합성한 모습이다. /남강호기자 kangh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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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월식이 최고조로 진행될때


부분월식이 최고조로 진행될때
【서울=뉴시스】

17일 저녁 9시를 전후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부근에서 관측된 부분월식의 모습을 400㎜ 망원렌즈를 사용해 최고조로 진행되었을때 촬영한 모습이다. /남강호기자 kangh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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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5. 10. 18. 09:43
[자연]부분월식을 한자리에

(대구=포토로) 음력으로 보름인 17일 오후 저녁 6시 51분부터 밤11시15분까지 우리나라에 부분 월식이 일어났다. 부분월식의 최고조는 밤9시30분께 최고조로 달했으며 전체의 7%정도 진행이 되어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관측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날 대구 지역에서도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에 그림자에 가려진 보름달을 육안으로 쉽게 관측을 할 수가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다음 월식은 2006년 9월 부분월식이며, 2007년 3월과 8월에는 달이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이 일어난다고 밝혔다. (이주희/photo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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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너머 2005. 10. 18. 09:39
17일밤 부분월식
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풍덩
한국천문연구원(원장 박석재)은 오는 10월 17일 일몰직후인 6시 51분부터 밤 11시 15분까지 부분월식이 진행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월식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부분이 극히 적어, 육안으로 달의 일부가 가려지는 모습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월식은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으로 늘어설 때 발생하는 현상으로 지구의 그림자는 태양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본영(本影)과 태양빛이 일부 보이는 반영(半影)이 있다(아래그림 참조).

부분월식은 태양, 지구, 달이 정확히 일직선으로 늘어서지 않고 약간 어긋나 있어서 달이 지구의 본영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번 월식은 오후 6시 51분 (일몰 직후)에 동쪽하늘에서 달이 지구 반영에 진입한 뒤, 밤 8시 34분에 지구 본영에 들어가며, 밤 11시 15분에 부분월식의 전 과정이 끝난다(아래표 참조).
해·지구·달의 기하학적인 위치에 따른 반영과 본영

시간에 따른 부분월식 진행상황


그러나 이번 부분월식은 최대식분이 0.068(달 전체 면적의 약 7%가 가려짐)로서 달의 약 7% 가량이 지구 본영에 들어가기 때문에 식 진행과정을 육안으로 관측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반영식이 진행되는 동안 달의 광량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이를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천문연은 밝혔다(아래그림 참조).
부분월식의 진행모습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다음 월식으로는 2006년에 9월에 부분월식이 있으며, 2007년 3월과 8월에는 개기월식이 일어날 예정이다.
취재 : marin678@kasi.re.kr (이동주) | 등록일 : 200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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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허해구 선생님의 최근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며 실천적 삶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http://heu3339.netian.com/

========================================================================

과학과 진리가 하나되는 길



부처님은 유사이래 처음 깨달음의 눈을 얻고 이 우주의 실상을 완전히 보셨다.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니, 이 세상은 완전한 질서로 이루어진 법계였으며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에 의해

한치의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법계와 진리의 실상은

당시 미신과 환상이 가득한 세상에서 전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법은 매우 수승하여

일반중생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생각하여

법을 펼치기를 포기하려 까지 했던 것이다.



《율장》대품에는 다음과 같이 부처님의 망설임을 표현하고 있다.



"고생 끝에 얻은 깨달음을 지금 또 어떻게 설할 수 있겠는가.

탐욕과 분노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진리는 미묘하고 심원한 것이기 때문에

탐욕과 암흑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생을 자비함이 부처님의 본질이기에

당신은 팔십 평생을 몸을 돌보지 않고 세상에 법을 전하셨고

이것이 오늘날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법이 세상에 전해짐으로써 세상에는

인과응보라는 도덕율과 바른 이치가 확립되었고

자신의 행위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양심이 밝아져

인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과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맛과 달콤함이 사라지듯이

불법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었고

결국 이름만 남긴 채 세상을 밝히는 생명의 요체는 사라지고

무의미와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불법의 요체는 우주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가르침과

원인과 결과의 이치로 집약된다.



즉 이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나타나있는 진실된 모습이니

눈앞에 나타난 사실에 기초하여 문제를 밝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원인을 지어

좋은 삶,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불법의 가르침인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입각하여 이치를 밝히고

증명된 것만 믿는 과학정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과학은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 이치가 검증된 것만 믿는다.



이와 같이 올바른 이치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고귀한 품성이다.



그래서 부처님 법이 나타났을 때 마음이 밝은 소수의 사람만이

그 사실성과 바른 이치가 좋아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처음 과학이 나타났을 때에도 많은 박해가 있었지만

그 이치가 너무나 명약관화하고 현실에서 증명됨으로써

종교적 환상과 미신적인 관념들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한 과학적 원리의 발견에 의해

중세의 어둡고 불합리한 관념들이 깨어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과학적 진리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비록 바른 이치로 사람들의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세상을 밝게 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는 속성 때문에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인간을 무의미와 소외에 빠뜨리는 한계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보다 더 중요한 생명과 정신에 의해 이끌리고 있기 때문에

물질로만 세상을 해석하게되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없게 되며

올바른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과학은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인간에게서

정신과 가치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동물화·물질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유물론자들의 말대로 인간은 우주의 먼지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왜 성자들은 이 세상 속에 완전한 질서가 있으며

인간을 일컬어 신성에 도달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라고 했을까?



만약 이 우주가 무의미한 혼돈덩어리이며

인간의 정신이 유기체의 화학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면

완전한 질서를 전제로 나타나고 있는 진리와 과학은 존재할 수 없으며

가치와 의미를 찾는 신성한 인간의 정신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물질의 지배를 받지만 점차 물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인류평화와 인간완성이라는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찾는 신성한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은 인류의 미래와 지구의 사활을 결정하며

인간완성을 이루어 우주의 근원에 이를 수도 있다.



우주 속에 이처럼 위대하고 신성한 생명과 정신이 이미 나타나 있다는 사실은

인과의 법칙상 이 우주의 근원 속에 생명과 정신의 원인이 되는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주 창조의 근본이며 질서의 바탕이 되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사람들은 우주의 근본, 조물주, 창조주, 하느님, 신성, 불성이라 부른다.



이 완전한 근본은 완전한 이치와 인과의 이법에 따라

완전한 질서와 법계를 만들고 자신을 닮은 신성한 정신을 만들어

자기의 완전성과 영원불멸성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신성하고 전지전능한 우주의 근본이 만들어 놓은

완전한 세상과 질서 속에서 인간은 정해진 법을 지키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과학은 이 세상 속에는 어김없는 질서와 법칙이 숨어있어서

이를 탐구하면 사물의 이치와 실상을 파악할 수 있고

사실적이고 참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유방식을 과학적 사고라 한다.



따라서 이 우주를 관통하는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이나

이 세상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질서를 찾아가는 과학자들이나

모두 같은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른 이치와 사유를 소유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왜 물질 속에만 이런 법칙이 있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 속에는

이런 법칙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만약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학자들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과학적 사고를 가지지 못한

얼치기 과학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우주의 기본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을 한치의 어김없는 법계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과 정신도 한치의 예외없이

철저한 인과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영혼과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 속에 깃든 인과의 이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진정한 목적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널리 이롭게 하는데 있다면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정신의 영역과 원리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아직 더 탐구해야할 미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검정할 수 없다고 제외하였던 정신의 영역마저

한정된 물질적 시각만을 가지고 부정하는 교만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는 인간의 신성한 의미와 가치가 부정되고

영혼과 정신이 무시된 채 육체적 인간과 물질적 관계만 남게 되었으며

과학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더욱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완전성을 지향하는 신성의 현현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지어져 있다.



그래서 세상이 물질화되고 무의미해질수록 인간들은

더욱 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한 것은 현대인들의 이러한 갈망과 공허감을 틈타

온갖 사이비종교들과 말법들이 교언영색한 말과 이치에 맞지 않는 환상으로

현대인들의 외롭고 아픈 가슴을 병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정신과 물질을 모두 관통하는 참된 진리가 나타나

과학과 말법의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어둠을 극복하고

인간의 참된 의미와 가치, 무한한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모두 포괄하고 현실과 내세를 일관되게 지키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여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이치로 이해하고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만이

물질과 정신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고 현실과 과거와 미래의 인과관계를 보며

업과 육신과 영혼과 세상의 문제까지 손쉽게 헤쳐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어떻게 인과의 이치라는

과학법칙의 적용을 받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요즘 물질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은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유기물의 화학반응에 불과하며

인간의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근시안적 주장은 사실을 왜곡하는 삿된 소견이며

과학이 저지른 가장 큰 죄에 속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과를 남긴다.



따라서 인류역사를 만들며 신성에 이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정신이

유기물의 화학반응으로 갑자기 생겨날 수 없으며

죽음과 동시에 펑하고 사라질 수 없다.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온갖 사유와 창조의 여정을 겪은 인간의 정신도

죽음과 함께 영혼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며

이 열매가 후생에 태어날 인간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굳이 인간의 전생과 영혼을 부정하고

자신의 삶이 가져올 후생의 과보를 무시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엄격한 과보를 요구하는 인과법을 인정할 경우

자신의 업과 욕망이 원하는 대로

제멋대로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전생과 윤회의 부정은 현대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의 원시적인 믿음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기독교에서는 바른 이치나 인과법을 떠나 단순한 믿음에 기초하여

모든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하며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무한한 사랑을 지닌 하느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해지니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세상을 밝히는 좋은 가르침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의 주장대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어떠한 악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악인들이 살판나는 세상이 될 것이며

어두운 세상에서 굳이 양심과 정의를 지키며

힘들여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언제든지 죄의 족쇄를 벗어날 수 있는

대속이라는 위선의 면죄부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길에는 대속이란 없다.

죄를 지었다면 누가 갚아도 빛을 갚아야 풀리게 되는 것이다.



남의 눈에 피를 나게 하고 원한을 사무치게 했다면

그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그 원한을 달래줄 수 있는 원인을 지어야 한다.



남의 원한이 풀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느님이 용서해준다고 해도

상대방과 세상에 지어놓은 자신의 죄를 지울 길이 없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 또한 자신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겉으로만 귀의하는 자를 용서해줄 리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양심과 정의를 지키며 바른 진리를 쫒아

좋은 원인을 지어야 한다는 밝은 가르침이 자리잡은 세상과



하느님이 모든 것을 좌우하며 그에게 귀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는

불합리한 믿음이 자리잡은 세상은 나중에 그 결과가 천지 차이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밝은 세상을 지키는 원리로서나

인간의 삶을 책임지는 행동원리로서나

자연의 절대 원리인 인과법을 부정할 수가 없다.



현대인들은 현대과학의 물질적 시각을 받아들여

영혼은 육체의 반영이며 자신의 근원이

부모의 육체의 결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콩이 자신의 뿌리를 땅에 박고 서있다고 하여

그 근본이 땅이 아니라 과거의 콩이듯이

인간도 비록 부모의 육신에서 태어났으나

그 근본은 부모의 육체가 아니라 과거 자신의 영혼인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각자가 타고난 영혼에 따라 모든 자식의 자질이 다른 것이며

우수한 근기를 지니고 태어난 자식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결국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뛰어난 인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펴보면 동물과 같이 탐욕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징기스칸과 나플레옹같이 세상을 지배하는 강한 힘과 의지를 가진 사람도 있고

석가와 예수와 같이 완전하고 신성한 영혼을 지닌 성자들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생을 돌면서 윤회하고 있는

각자의 영혼이 겪어온 여정과 그릇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말처럼 인간의 정신이

모두 똑같은 단백질덩어리의 화학반응에 불과하다면

현실에서 이토록 큰 편차를 나타내고 있는 인간정신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콩이 콩을 낳고 팥이 팥을 낳듯이

사람의 정신도 과거 생에 자신이 습득한 자질과 능력을

이생에서 그대로 다시 피어내게 된다.



즉 과거 생에 영웅의 삶을 산 사람은 이생에 나서도

세상을 보는 밝은 눈과 강한 의지와 성실한 노력이 있어서

세상일을 잘 처리하고 남을 이끄는 자리에 오르게 되며

과거에 그림을 좋아한 이는

이생에 나서도 그림을 좋아하게 되며 미술에 소질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음악이나 바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박과 호박의 떡잎이 어릴 적은 비슷해도

열매가 맺힐 때면 자신의 독특한 형질을 그대로 나타내듯이

인간의 자질과 성품도 나이가 들면

과거 생에 자신이 습득한 것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수많은 생을 통하여

자기 속에 형성되어 있는 근본 모태를 바꾸지 않는 한

호박은 호박의 운명을, 수박은 수박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과법의 올바른 이치이다.

그래서 타고난 운명을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 과거의 원인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면

인간은 살아갈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은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원인과 결과의 연속선상에서

계속 새로운 원인과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 속에 좋은 원인을 받아들여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좋은 원인을 지으면 자신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삶과 진리와 깨달음의 역할이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근본을 바꾸면

씨없는 수박을 만들고 새로운 품종을 얻을 수 있듯이

인간의 정신도 올바른 진리를 배워 깨우침을 얻고

현재의 자기 삶을 좋은 자질과 성품으로 가득 채운다면

그는 새로운 영혼으로 태어나 좋은 운명을 받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위대하게 축복한 위인들의 성품과 자질을

나의 것으로 개발하고 그들의 깨달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의 운명도 그들과 같이 변하는 것이 이치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삶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바른 지혜와 깨달음을 얻은 선한 업을 행함으로써

자신 속에 얻게된 좋은 자질과 품성은

세세생생 그에게서 나타나 좋은 운명을 받게 되며

탐욕과 악한 품성에 의해 이치를 어기고 저지른 악업에 의해

얻게 된 무지하고 탁한 품성은

그의 후생을 미신과 탐욕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부처님도 수많은 생을 돌면서

쌓은 공덕과 좋은 성품에 의해 계속 인간완성의 길을 걷다가

비로소 이생에서 그 열매를 맺어 인간완성을 이룬 것이니



무릇 해탈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진리의 인연을 만나 자신 속에 선근을 쌓아야

그 힘으로 계속 정법의 고리를 돌아 마침내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 후생의 과보에 대해 알아보자



한 인간이 치열한 삶의 결과로 영혼의 결실을 거두게 되면

그 영혼은 자연의 법칙에 적용을 받아

맑고 가벼운 것은 높이 오르고 무겁고 탁한 것은 가라앉게 된다.

* 여기서 참고로 인간의 정신은

선근(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비)이 커지고 밝아질수록

그 영혼이 가벼워지고 강한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맑고 가벼운 영혼은 높은 곳에 이르게 되며

무겁고 탁한 영혼은

이 세상의 탁하고 끈적끈적한 윤회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도는 유혼이 되고 만다.



높은 곳에 이른 영혼은 모든 것이 평안한 천상에서 편히 쉬다가

자신의 영혼을 완성시킬 때와 장소를 골라 다시 태어나 인간완성을 이루게 되며

세상을 떠도는 유혼은 꿈처럼 다가오는 영적 환상과 지옥도의 고통 속에

기운이 피폐하고 갈라져 자신의 영혼을 간직하지 못하고

미물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된다.



인간의 길은 이처럼 인과의 이치에 따라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니

모든 성자들은 정법에 따라 좋은 원인을 지으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이치가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이 함부로 남을 속이고 죄를 저지르며 살 수가 없다.



지금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도

정법이 빛을 잃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져

명백한 인과의 이치와 양심을 무시하고

설마 나에게 그런 나쁜 결과가 미칠 것인가 하는

이기적인 단견으로 함부로 악을 저지른 결과 그 악의 업보가 번져

나의 주변과 세상에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과의 법칙아래 완전하게 흐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이치를 흐트러뜨리려는 의도로 질서를 해치는 원인을 지으면

질서는 무너지며 세상은 힘과 빽과 뇌물에 의해 좌우되는 말세가 된다.



즉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고 무의미한 것은 완벽한 인과법의 작용에 의해

질서를 붕괴시키려는 인간의 삿된 행동들이 세상을 망친 결과인데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세상이 본질적으로 혼돈스럽고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이처럼 인과의 법은 정신과 물질과 우주를 모두 관할한다.



이제 수천년간 인간의 눈을 가려왔던 미신과 무지와 환상을 헤치고

물질과 정신과 세상을 완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실상의 진리가 이곳에 나타났다.



이 진리는 완전한 우주의 근원에 의해

태초부터 이 세상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며

세상을 이치대로 만들고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본래부터 정해져있는 삶의 목적과 길에 따라

자신을 바쳐 바른 이치로 세상을 축복해 나가면

마침내 신성한 진리체가 되어 인간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며

모든 것이 이치대로 되는 밝고 건강한 세상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길은 부처님이 처음 발견한 것이지만

그동안 생명의 빛을 잃었던 것을 이제 다시 밝히는 것이니

모두 힘을 모아 이를 권하고 실천하여

현대사회의 모든 정신적 혼란과 무의미를 극복하고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실현되는 복된 세상을 만들어내야 한다.



진리의 빛은 혼자만 알고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과 더불어 실천해야 자기 것이 되고 자신의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위해 좋은 행위를 하면

그 힘과 의지와 성품이 자신 속에 쌓이고

세상에 악을 행하면 그 악한 마음과 탐욕이 쌓이게 된다.



그 동안 수많은 혁명가와 운동가들이

갖가지 이념과 목적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바쳐왔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있는 이념은

참된 실상과 진리에 기초하지 않았고

하나의 꿈과 이상에 불과했기에

오히려 세상을 불행하게 하고

그들 속에 한과 업을 쌓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했고 그들의 처방이 옳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사람은 올바른 목표와 이치에 의해 움직일 때는 그만큼 맑아지지만

그릇된 환상과 잘못된 방법에 의해 움직일 때는 그만큼 어두워진다.



그 이유는 그 마음이 흐리기 때문에 환상을 찾았고

이치에 어두워 엉뚱한 길만 헤맸기 때문에

그 어리석은 마음과 무지한 업이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인과의 법이니

그래서 옛부터 참된 정법을 만나 올바른 인간완성의 길로 가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바늘이 겨자씨에 꼽히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수천년 만에 처음 진리와 귀한 인연을 맺은 우리들이

세상을 개혁하고 자신을 구원하는 참된 삶의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실상과 바른 이치를 본 선한 사람들이

진정한 실천가, 개혁자가 되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의 어둠이 벗겨지고 참된 인간완성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인간진리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인간진리주의란 물질과 정신과 세상을

관통하는 참된 진리를 찾아 인간이 그 중심에 서서

세상의 어둠을 벗겨내고 인간을 축복하는 운동을 말한다.



진리를 하나의 이즘으로 규정하는 것은 미흡한 점이 없지 않지만

현실 속에 빛을 전하기 위해 모두가 참여하는 운동의 형식으로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나서야 한다!

역사는 움직이는 자의 몫이니 짓는 만큼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리는 세상의 바탕이며 인간의 존재이유이다.

따라서 참된 진리에 따라 세상을 축복하는 일을 할 때만이

인간의 가치가 본질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며

생명창조의 근본목적인 인간완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참된 진리를 배우고 익혀

미신과 불합리와 권위로 이루어진 주변의 모든 관행과 어둠에 대해 극복하고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실현되는 지상낙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기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의 빛을 이 땅에 널리 전하기 위해서도

힘을 모아야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이

참된 진리를 이 땅에 실현하기를 원한다면

진리에 눈뜬 자들이 자신의 사명과 중요성을 자각하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



그래야만 수천년간 인류를 짓밝고 있는

거대한 어둠의 기둥과 장막들을 무너뜨리고

참된 진리와 인간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구도자들이 실천력이 약하다는데 있다.



그 동안 구도자는 사회에서

비현실주의자, 은둔자, 이상론자로 비추어져 왔다.

그 이유는 정법이 흐려진 세상에서 대부분이 말법을 진리로 알고

염세적이고 무위적인 삶을 참된 삶으로 착각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위해 실천할 힘과 용기가 부족한 것은

이처럼 관념을 좋아하고 실천을 꺼리는 과거의 잘못된 업이

이생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양심과

땅이 꺼져도 꺽이지 않을 용기이다.



자신을 세상에 바칠 수 있는 사랑과 용기가 있어야

말세의 거친 시련을 이겨내고 여태껏 살아온 자신의 업과 욕망을 극복하여

인간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소수의 창조자가 만들어왔듯이

세상을 살리는 진리의 길 또한 선한 근본을 지닌

소수의 구도자들에 의해 꽃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의 근원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뜬 분들은

이 소중한 깨달음의 인연을 중시하여 지식인의 방관에서 벗어나

실천하는 삶을 살아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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